<김동길 인물 에세이>
박정희(1917~1979)
나를 감옥에 넣었지만…
보릿고개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어느 역사가 말대로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나도 생각한다. 그리고 그 끊임없는 대화의 결과로 어느 정도 미래를 점칠 수 있다고 자부한다. 1948년에 탄생한 대한민국이라는 공화국의 존재는 앞으로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반드시 역사에 남을 것이고 대한민국을 이야기 할 때에는 두 사람 이름이 틀림없이 기억될 것이다.
공화국을 수립하고 1950년에 벌어진 한국전쟁에서 그 공화국을 지켜낸 이승만과, 찢어지는 가난으로 춘궁기가 되면 풀뿌리, 나무껍질로 연명하던 농촌이 세끼 밥을 먹고 살 수 있는 나라가 되게 하는데 큰 공을 세운 박정희가 바로 그들이다.
내가 한때 대한민국에서 가장 미워한 사람이 박정희였다. 나의 논리는 단순한 것이었다. 군사 쿠데타라는 것은 아프리카나 중동이나 남미 같은 후진국에서나 벌어지는 정치적 불상사라고 믿고 있었고, 그래도 개발도상국이라고 자부하던 대한민국에서 군인들이 총을 들고 일어나 정권을 찬탈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받은 민주 교육의 핵심이기도 하였다. 그는 다섯 번 이 나라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중단 없는 전진'을 강조하며 마치 두발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처럼 전진을 잠시도 멈출 수 없다는 듯이 권력 유지에만 급급한 것으로 내 눈에 비쳤다.
그는 1970년대에 접어들어 드디어 유신 헌법, 유신 체제를 국민에게 강요하며 이에 관련된 포고령을 내리면서 '유신 헌법은 찬성할 자유는 있지만 반대할 자유는 없다'고 못을 박고 유신 헌법을 반대하는 자는 15년 이하 징역이 끝나도 또다시 15년은 공민권을 박탈한다고 선포하였다.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던 나로서는 매우 난처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어쩔 수 없이 '유신 헌법은 민주 헌법이 아니다'라고 가르칠 수밖에 없었고 대중 강연에서도 서슴지 않고 나의 소신을 피력하였다. 그때 이미 내 마음속에는 15년 징역을 살 각오가 되어 있었다.
예측했던 대로 나는 기관원들에게 연행되었고 서빙고에 자리 잡은 보안사령부 분실에서 1주일가량 조사를 받았다. 나를 취조하던 문관 한 사람은 스스로 이북 출신임을 털어놓으면서 말했다. "김 교수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청와대에서 묶어 오라고 하니 저희 입장도 난처합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앞으로 감옥 생활도 할 만하겠다고 느꼈다.
지금은 역사기념관으로 변모한 서대문 구치소 9사상 18방에 수감되어 살던 어느 날 새벽, 내가 갇혀 있던 한 평도 안 되는 독방에서 매우 기이한 종교적 체험을 하였다. 아직도 새벽인데 비바람이 심하게 몰아쳐 그 독방에 마련된 조그마한 비닐 창문으로 폭풍에 부러진 나뭇가지가 뚫고 들어올 것 같은 무시무시한 날이었다. 그 비바람이 얼마나 계속되었을까?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그 위기를 헤쳐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비바람이 멎고 얼마 뒤에는 찬란한 태양이 솟아오르면서 어디선가 이런 음성이 들려온다고 나는 느꼈다. "사랑하라, 사랑하라, 사랑하라." 그 음성을 내 귀로 나는 분명히 들었다. 그 순간부터 그토록 미워하던 박정희에 대한 증오심이 싹 사라지고 내 마음에는 그에 대한 동정심이 생긴 것이 사실이다.
박정희는 경상북도 구미에서 넉넉지 못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창 시절에 그가 동경한 역사적 인물은 프랑스의 나폴레옹과 우리나라의 이순신이었다. 그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문경에서 한 3년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그는 만주 군관학교를 지망하여 합격하였다. 2년 뒤에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전학하여 수석 졸업하였지만, 일본군에 소속되지 못하고 만주군 대위로 있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 아마도 그의 꿈이 나폴레옹처럼 군인이 되어 정치적으로도 크게 성공하는 인물이 되는 것 아닐까.
어찌 보면 박정희는 천운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여수·순천 반란 사건으로 목숨이 경각에 달린 그를 구해 준 것은 백선엽이었다. 그를 5·16 쿠데타 대표로 모신 것은 김종필이었다. 그가 18년이나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김종필과 이후락의 충성 경쟁이 크게 주효했다고 나는 보고 있다. 백두진, 김용환, 남덕우, 이승윤 등 그의 측근으로 모여든 경제 각료들은 당대의 수재였다.
그뿐인가. 일본 육사 출신이 한국 대통령이 된 사실에 감격한 탓인지,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인지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우리보다 경제 선진국이던 일본이 박정희를 적극적으로 도운 사실 또한 그가 타고난 천운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새마을운동은 한국의 농촌에 큰 변화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중동 지역과 동남아에서도 크게 환영받은 것이 사실이다.
1979년 10월 26일, 한국 역사의 큰 획을 그은 '그때 그 사람'은 김재규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맞았지만, 그가 임기를 다 마치고 무사히 은퇴했다 하여도 노후가 과연 평화로웠을까. 오늘 우리가 겪는 이 시련도 박정희의 18년 집권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그가 심혈을 기울여 일군 이 나라의 경제적 번영이 다시 '보릿고개'로 돌아갈 수는 없다.
문재인 대통령의 '퍼주기' 때문에 한국 경제가 침몰할 것을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박정희 덕분에 나는 이 나라 유명 인사가 되어 90이 넘도록 장수를 누리고 있지만 그 시대가 돌아오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날이 되돌아오기를 희망합니까?' 하고 누가 물으면 나는 영어로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No, thank you."
*여기부터는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박정희(朴正熙, 1917년 11월 14일 ~ 1979년 10월 26일)는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고령. 호는 중수(中樹)이다. 일본명은 다카키마사오[高木正雄].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교사로 재직하다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성적 석차 2등으로 만주국 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성적우수자 추천을 받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57기로 입학한 후 1944년 성적 석차 1등으로 졸업했다.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일본 제국이 수립한 만주국의 일제관동군장교로 근무하였다. 일제가 패망하고 1946년 7월에 귀국하였다.
귀국 이후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지내던 중, 형인 박상희가 경찰에게 사살 당하자 이재복의 권유로 복수심에 남조선로동당에 입당하여 활동하였다가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에서 여수·순천 사건 연루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정보국에 남조선로동당 조직과 동료들을 증언한 후,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었던 백선엽의 최종 면담에서 사형을 면하였다. 한국 전쟁이 나자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참전하였다.
5·16 군사 정변을 주도하였고, 이로써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어 정치를 시작하였다. 1963년 12월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제5·6·7·8·9대 대통령으로 장기집권을 하였다. 국가재건사업을 추진하여 1968년부터 경부고속도로 기공 및 개통, 서울 지하철 기공 및 개통, 농촌의 현대화 운동이었던 새마을 운동, 대규모 중화학 공업 건설 및 육성, 민둥산의 기적인 산림녹화 사업, 식량 자급자족 실현 등 조국 근대화 정책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고, 후진국 탈피와 경제자립으로 국가발전의 기틀을 닦았다.
3선 개헌 및 유신헌법 등의 장기 집권을 반대하던 여야 및 학생운동이 일어났다. 1979년 10월 무렵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으로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연회를 하던 도중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가 쏜 총탄에 맞아 암살당했다.
박정희의 대통령 직무 수행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장면 내각이 수립한 국가 주도 핵심 공업 개발을 골자로 하는 '불균형 개발 모델-지도받는 자본주의 체제'(제2공화국과 울프 박사의 합작인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미국이 주문한 환율 현실화 및 노동집약형 수출 경공업 개발을 비교적 충실하게 따랐다는 평가와 무리하고 비효율적인 중공업 중복 투자 및 지나친 관치 경제로 인한 금융 시장의 부실화로 한국의 경제발전을 늦추었다는 평가가 공존하고 있다.
이외에도 새마을운동을 통해 농촌 발전에 성공했다는 긍정적 평가와 군정 시절 이래로 중농 정책, 통일벼 보급, 새마을운동에도 불구하고 농촌과 농가 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다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고 있으며, 그린벨트 규제에도 불구하고 수도권 과밀을 예방하지 못했다는 부정적 평가, 의료보험 제도가 오늘날 한국 의료보험의 토대가 된 전두환 정부의 의료보험만 못하다는 부정적 평가, 개발 위주의 획일화된 정책이라는 부정적 평가 등이 뒤따르고 있다.
다만, 제1공화국과 제2공화국에서 꾸준히 실시되었던 사방 사업, 조림 사업, 산림 복원 사업 등에 관하여는 호평이 더 많은 편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존경하는 대통령을 비롯한 대통령 선호도와 공적 부문 등에서 최상위 평가를 받아오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5.16 군사 정변, 10월 유신을 통한 헌정 파괴, 노동 운동 및 야당 탄압, 군사 독재 등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한일협정을 강행한 것과[13] 베트남 전쟁 파병에 대한 평가가 양립하고 있다. 핵무기 개발, 행정 수도 이전을 추진하기도 했다. 또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의 영향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다소 낮아져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문재인 대통령이 1위를 차지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2위로 하락하였다.
생애 초반
1917년 아버지 박성빈과 어머니 백남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마루에서 굴렀다가 마루 밑에 놓인 화로에 떨어져 머리카락과 눈썹 부분에 화상을 입기도 하였다. 아버지 박성빈은 황토를 짓이겨서 박정희에게 발라주었고 이때 화상을 입어 피부가 검게 그을린 것이라 한다. 이 일 이후로 박정희는 짧은 옷을 입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유년기에는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훗날 입학하는 구미공립보통학교의 입학 전 경력에도 한학 수학이라 기재되어 있으며 학교에 다니면서도 일요일에는 서당에 가서 한문을 배웠다고 한다. 일요일에는 교회에도 다녔고, 나머지 시간을 이용해서 서당에 다닌 것이다.
아버지는 조선 후기에 무관직 정9품 효력부위를 지냈으나 동학 접주 출신으로 연좌되어 가장으로서 경제생활을 할 수 없었고, 맏형 박동희는 독립하였으며 둘째 형 박무희와 셋째 형 박상희가 실질적인 가장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아버지와 둘째 형은 인근 경기도 관찰사를 지낸 칠곡군의 갑부 장승원을 찾아가 그의 집안 토지의 소작농으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후일 장승원의 아들 장택상은 이를 회자화 하며 박정희를 공격했고 박정희는 이로 인해 장택상과 아주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1926년 4월 1일에 구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보통학교 시절, 2학년 때까지는 급장을 담임선생이 지명했으나 3학년 때부터 교칙이 바뀌어 1등을 하면 급장을 시켜주는 새로운 제도 덕분에 공부를 잘하던 박정희는 3학년 때부터 내내 급장을 맡았다. 이때 박정희의 급우 가운데 그로부터 맞아 보지 않은 아이들이 드물었다고 같은 반 동기생이었던 박승룡이 회고한 바 있다.
한편 그의 담임은 박정희에 대해 평가하기를 '성적은 전 과목이 고루 우수하며 암기력이 좋아 산수, 역사, 지리 등은 언제나 만점을 받았다고 기록하였으며, 조리 있는 발표력과 예민한 사고력을 특기사항으로 기록하였다. 반 학생 중 나이가 어렸으나 급장으로서 통솔력이 탁월하고 자습시간 등에는 학우들을 지도하였으며 체육 시간에 선생이 나오기 전에 준비를 하여 기다리도록 지도를 잘한다고 평하였다.
당시 박정희는 학교 수업 외에 독서를 즐겼는데, 군인을 동경하였으며 그중 나폴레옹과 이순신의 위인전을 탐독해 읽었다고 한다. 박정희 자신의 회고에도 '소년 시절에는 군인을 무척 동경했음. 그 시절 대구에 있던 일본군 보병 제80연대가 가끔 구미 지방에 와서 야외 훈련하는 것을 구경하고는 군인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보통학교 시절에는 일본인 교육으로 일본 역사에 나오는 위인들을 좋아하다가 5학년 때 춘원 이광수가 쓴 '이순신'을 읽고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게 됐고, 6학년 때 '나폴레옹 전기'를 읽고 나폴레옹을 숭배하였다고 회상하였다.
소년 시절에 박정희는 친구를 따라 개신교 교회에 다녔다. 그의 동창인 한성도는 조갑제와의 인터뷰에서 이때 그가 주일학교에 다녔다고 증언하였다. 그러나 뒤에 박정희는 종교를 바꾸게 되었다.
형편상 도시락을 싸 올 수 없을 때도 종종 있었다. 끼니를 거를 때도 있었지만, 한약방을 하던 집 아들인 급우 이준상과 친해지면서 도시락을 싸 올 수 없는 날에는 학교에서 5분 거리인 그 친구의 집에 가서 점심을 먹기도 하였다. 이준상의 집안은 그의 아버지가 작고한 이후 가세가 급속히 기울어진데다가 병이 있어 어렵게 살고 있었다.
박정희는 1963년 10월 15일 선거에서 제5대 대통령으로 당선 되었을 때 경주에 있다가 생가를 찾아 구미역에 도착했다.
환영 인파를 대하자 박정희는 제일 먼저 이준상을 찾아 허름한 차림의 그를 자신의 지프에 태운 뒤 생가로 이동했다. 이후 구미에서는 가난한 장애인 이준상을 아무도 업신여기지 못했다 한다. 1972년 이준상이 어릴 때 다친 다리를 또다시 다쳐서 입원했을 때 대통령 박정희는 그의 병원 치료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1932년 3월 1일에 보통학교를 제11회로 졸업한 박정희는 그해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했다. 총 응시자는 조선인과 일본인 합하여 모두 1,070명이었다. 당시 박정희의 집은 가난하여 학비를 댈 엄두도 못 냈고, 그의 가족들은 내심 그의 사범학교 진학을 포기했으면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구미공립보통학교의 담임과 교장이 방문하여 박정희의 부모를 설득하여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하게 하였다. 누나 박재희의 증언에 의하면 어머니 백남의는 박정희가 시험에서 떨어지기를 빌었다고 한다. 합격하고 진학을 못 하면 한이 생긴다고 하여 불합격을 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51등으로 합격하였다.
1932년 4월 1일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에 제4기생으로 진학하였다. 이때 입학정원 100명이었는데 이 중 조선인 90명, 일본인 10명이었다. 대구사범학교 진학 후 박정희는 집을 떠나 대구 시내 기숙사에서 등하교하였다. 대구사범학교 5년 중 3년간 그의 성적은 하위권이었다. 품행평가에서 '양'이 네 번, '가'가 한 번이었으나, 군사 및 체육 관련 교과목의 성적은 뛰어났다. 이 성적표는 그의 집권 기간에는 공개 금지가 되기도 하였다.
교사 생활 (1937 ~ 1939)
1936년 4월 1일 김호남과 결혼했다. 병을 앓고 있던 아버지가 죽기 전에 막내가 결혼하는 걸 보고 싶다고 간청하여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1937년 3월 25일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4월 1일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4학년을 맡았다. 그 해 장녀 박재옥이 태어났고 1938년 9월 4일에 아버지가 67세의 일기로 사망하였다.
한편 1939년 행적에 대해 다른 견해도 있으나 만주에 있었던 것을 빼면 확인된 것은 없다. 중화인민공화국 조선족 작가 류연산은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에서 박정희가 신징 육군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하기 전인 1939년 8월, 대사하 전투에 참여했고 이후 간도 조선인특설부대에 자원입대해 동북항일연군 토벌에 나섰다. 교직은 1940년 2월까지 재직하였다고 한다.
※ 대사하 전투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이 길림(吉林)성 안도(安圖)현 대사하(大沙河)지역에서 전투를 개시해 일본군과 괴뢰군을 타격하고 전투의 승리를 거두었다. 동북항일연군의 장대와 항일유격전쟁의 광범한 전개는 동북에서의 일본군의 식민통치를 크게 타격했다. 동북항일연군을 타격하기 위해 일본군은 1938년부터 일본군이 동북에 대량으로 병력을 투입해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보다 흉악한 "토벌"을 진행했다. 일본의 전격적인 공격으로 동북항일유격전쟁이 매우 간고한 단계에 접어들었다.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1936년 중국공산당 지도 아래 만주에서 만들어진 항일투쟁을 주도한 군사조직으로, 중국인과 조선인 등의 민족통일전선 성격을 띠었다.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선인과 중국인의 유격부대를 공산당의 주도로 통합한 군사조직이다. 당시 만주에 있던 수많은 항일계열 군사조직 중에 제일 큰 세력을 형성하였으나, 1939년 일본 관동군의 대대적인 공세에 의해 1942년 소멸되고, 잔존 세력은 소련으로 도피하였다.
박정희의 셋째 딸 박근령은 2005년 2월, 이러한 주장을 담고 있는 서적이 부친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국내 출판사 대표인 아이필드 출판사 대표 유연식을 검찰에 고소했고 대법원 3부(주심 안대희 대법관)까지 올라갔으며 1939년, 박정희가 서명한 문경공립보통소학교 “성적통지표”와 1940년, 박정희가 교직을 의원면직했음을 보여주는 교육 당국의 서류를 제출하였는데 이와 관련된 재판에서 안대희 재판관 등 재판부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무죄를 판결했다.
“그의 친일 행적 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고 특설부대에 근무했는지도 한국 현대사의 쟁점으로 계속 연구돼야 한다. 책에 적시된 내용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에 반한다고 하더라도 피고인이 ‘허위’임을 인식했다고 단정할 수 없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은 정당하다.”
"역사적·공적 인물의 경우 시간이 경과하면 망인과 유족의 명예보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표현의 자유가 보호돼야 하므로 사자 명예훼손죄가 성립하려면 허위 사실에 대한 고의성을 엄격히 따져야 한다."
"박 전 대통령의 특설부대 근무설은 여러 책에 언급됐고 저자 류씨는 역사학계에서도 인지도가 있어,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유죄가 인정되지 않는다.“
*출처|통도사반야암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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