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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하운 김남열의 자기애自己愛로의 의지

by 시인 김남열 시문학 2020.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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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애自己愛로의 의지

 

하운 김남열

우리가 꿈꾸는 평화로운 이상세계란 어떠한 곳인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인가, 아니면 또 다른 우리가 꿈꾸는 세상인가.

살아가면서도 이 세상에서 저 세상을 갈망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내가 생각하는 평화로운 이상세계란 자기애自己愛가 자기중심에서 타자중심으로 바뀌어 질 때 이상세계에로의 울림은 시작된다고 본다.

그 자기애自己愛란,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육신肉身과 정신情神을 사랑하는 것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한 없이 나약하면서도 불굴不屈의 강인성을 가지고 있다.

나약하기에 인간적일 수도 있고, 강인하기에 더 사람다울 수도 있다.

그러기에 인간은 신 존재에 의탁하기도 하고 신과 같은 존재가 되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인간은 자신이 스스로 신과 같은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또한 많은 사람들 앞에 굴림 하길 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굴종 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사는 사람들도 있다. 이 같이 인간은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정·반 합일의 성장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 왔다. 특히,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에 관심을 두든지, 어떠한 것들에 호기심을 가지든지 항상 스스로의 자신이 중심이 되어왔고 그 다음이 주변 상황을 생각하며 인식하여 왔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애自己愛는 인간 본연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 자기애의 마음이 집착으로 변화할 때에는 탐욕이 되어 왔고, 대상은 자신을 위한 수단과 목적이 되었다. 반면 자기애의 마음이 타자 중심적이 될 때에는 배려와 존중의 미덕으로 승화 되었다. 그래서 사회는 평화롭다 하였고 인자가 누구인지, 선지자가 누구인지, 명성이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것은 커다란 관심이 되지 않았다. 그 사회는 진정으로“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가 있는 보여주는 사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본능적으로 그 내성은 선과 악의 양면적 모습으로 공존한다. 그 양면적 모습은 인간은 태어나면 누구나 가지는 인간 본연의‘의지’이며, 그 의지가 후천적으로 학습됨으로서 선한 의지가 되든지, 악한 의지로 변화든지 하였다.

그 선한의지와 악한 의지의 상호 양립 관계성 속에서 사회는 면면이 이어져 왔다.

 

차별에서 세상의 문제가 생기고

비교에서 사회의 문제가 일어나고

구별에서 사람들의 문제가 발생한다

 

차별을, 비교를, 구별을

종속의 관계로 생각하지 말고

평행의 다양한 차이로 인정할 때

 

이기는 배려의 마음으로 변하고

탐욕은 공덕의 가슴으로 변하고

나와 네가 우리가 되어

 

세상이 어울림의 이웃이 되는

더불어서 함께 무애舞愛의 춤추는

아름다운 놀이마당이 되리라

 

허나, 이것이 마음먹은 대로 되더냐

선인이라고 하든, 악인이라고 하든

인간의 선의지가 갈대처럼 부조리하면

식물이 뿌리가 썩으면 몸체가 죽듯

사람도 그 뿌리인 정신이 병들면

몸은 자연 병들고 마는 것과 같으니

 

지금껏 세상에 뿌리 두고 살면서

내가 예 할 때 아니오 하고

아니오 할 때 예하는 것은

 

겉이 희고 속 검은 이 많은 것처럼

겉이 검지만 속 하얀 이도 많은 것이

현실의 작태이기 때문이다

- 하운 김남열의 시 무애의 춤추는 세상에서-

 

이 같이 구별은 그 사회가 어떤 형태로 존재하든 분명하게 판단의 가치가 되었다.

한편, 그 구별의 가치는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가치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사회의 문제는 누구와 누구를 비교하고, 차별하고, 구별하기 시작하면서 생겼다. 물론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서 구별은 인간 사회의 질서를 위해 필요하다. 구별이란 가치가 규정되어지지 않고서는 그 사회는 무정부적인 혼란한 사회가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있는 자와 없는 자, 권력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선한 자와 악한 자, 도덕과 비도덕, 법과 악법, 남성과 여성, 위와 아래, 강자와 약자...,등 그러나 그 구별의 정의를 말함에 있어서 전제가 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 1) 사람들의 마음가짐이며 2) 차별적 종속의 관계에서 생각하느냐, 횡적 관계선상에서의 평등한 차이의 관계를 가지느냐는 것이다. 물론 건강한 수직적 사회에서는 횡적인의 사회에나 큰 구별은 없다. 왜냐하면, 방임에 의한 평등한 자유는 오히려 수직적 관계에 의한 종속의 관계성 속에서의 자유보다 못하기 때문이며, 오히려 혼란만 가중하고 사람 개개인의 책임감조차도 무디게 되어버리는 법과 도덕과 관습 속에서의 책임감마저도 박탈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적인 사회체제와 횡적인 사회체제의 균형적인 발전이 사회의 안정을 찾아가는 것이 이상적인 시스템이다.

종적인 관계성 속에서도 상·하 존중이 필요하고, 횡적인 관계성 속에서도 서로의 책임감과 의무감이 따라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종적인 관계와 횡적인 관계는 상호 소통이 안 되며, 서로의 통로는 폐쇄적이 되어 버린다. 무엇보다 그것의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사람들의 열린 마음이다. 사람들의 배려하는 마음이다. 사람들의 상호 존중하는 마음이다.

이러한 마음이 전제가 되고 의지가 되지 않는 이상,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사회는 허구적 이념일 뿐이며 모든 인간 행위 자체가 자기중심적‘자기애’를 위한 것일 것이다.

 

사람들의 이기적 자기애가 강한 사회는 그 사회가 어떠한 논리와 체제로 움직여진다고 하더라도 큰 차이는 없다. 세대가 바뀌고 다음 세대가 이어져도 그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든, 민주주의 사회든, 공산사회든, 사회주의 사회든,자유주의 사회든 그 사회가 그 사회이다.

 

‘자기애’가 타자애로의‘자기애’가 아닌, 자기중심적인 이기적‘자기애’로 바윗돌처럼 굳어져 있는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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